2022년 하반기 레고랜드 사태 이후 채권과 CP 가격 급락으로 채권형 랩의 손실과 환매 지연 문제가 불거진 가운데, 금융감독원이 증권사의 고객자산 운용 책임을 인정하는 첫 분쟁조정 결정을 내렸다. 이번 결정은 자본시장법상 투자일임업자의 주의의무와 충실의무 위반에 대해 행정 제재를 넘어 민사상 손해배상 책임까지 명확히 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하이라이트
- 금융분쟁조정위원회는 증권사의 채권형 랩 운용위반에 대해 고객별 손해의 60~70%를 배상하도록 최초로 결정했다.
- 분조위는 고객 A에게 12억6천만원, 고객 B에게 3억9천만원 등 총 16억5천만원의 손해배상을 산정해 지급하도록 했다.
- 이번 결정은 2023년 금융위·금감원이 9개 증권사에 289억7천만원 과태료를 부과한 운용제재와 맞물려 업계 리스크 관리 강화 압박을 시사한다.
채권형 랩 운용 위반과 배상 결정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전날 열린 금융분쟁조정위원회는 증권사가 고객의 채권형 랩 계좌를 운용하면서 시장가격보다 높은 가격에 기업어음(CP)과 채권을 매입하고, 상품 만기와 맞지 않는 장기 채권을 편입한 점을 문제로 판단했다. 이에 따라 위원회는 증권사가 주의의무와 충실의무를 위반했다고 보고 고객별 손해의 60~70%를 배상하도록 결정했다.채권형 랩은 증권사가 고객과 1대1 투자일임 계약을 맺고 자산을 운용하는 상품이다. 주로 법인 고객의 단기자금 운용 수단으로 활용됐지만, 시장금리 급등 이후 채권과 CP 가격이 하락하면서 손실과 상환 지연 문제가 발생했다.
분조위는 증권사가 시가보다 높은 가격, 또는 민평금리보다 낮은 금리 조건으로 고객 자산을 매입한 행위를 부적절하다고 봤다. 또한 랩 상품 만기까지 두 달도 남지 않은 시점에 잔존만기 약 10개월의 채권과 CP를 편입해 시장 상황 변화에 대한 위험관리를 소홀히 했다고 판단했다.
금감원 검사에서는 다른 고객의 목표수익률을 맞추기 위한 이른바 제3자 이익도모 목적의 고가 매입 거래가 다수 확인됐다. 분조위는 해당 증권사가 과거 신탁재산 상호거래 금지 위반으로 제재를 받은 뒤에도 유사한 위법 운용의 재발 방지 노력을 충분히 하지 않았다고 봤다.
개별 배상 규모와 업계 파장
분조위는 고객 A에게 손해액의 70%에 해당하는 12억6천만원, 고객 B에게 손해액의 60%에 해당하는 3억9천만원을 배상하도록 했다. 손해액은 가입 당시 제시된 목표수익률을 기준으로 만기 시 받을 수 있었던 원리금과 실제 상환 시점까지의 지연손해금을 반영해 산정됐다.A는 2023년에 채권형 랩 2개 상품에 총 80억원을 투자했다. 그러나 증권사는 첫 상품 만기 하루 전 내부 감사가 진행 중이라는 이유로 환매를 일방적으로 연기했고, A는 이후 원금보다 4억6천만원 적은 795억4천만원을 돌려받았다.
B는 같은 해 두 차례에 걸쳐 15억원씩 투자한 뒤 약 4억5천만원의 평가손실 통보를 받았다. 이후 거래내역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CP의 매입과 만기 불일치 운용 사실을 파악해 운용 중단을 요구했고, 당시 CP 가격 하락으로 즉시 환매가 어려워 편입된 CP 만기까지 보유한 뒤 153억원을 상환받았다.
이번 결정은 금융당국의 채권형 랩과 신탁 운용 제재 흐름의 연장선에 있다. 금융위원회와 금융감독원은 지난해 2월 채권형 랩과 신탁 관련 자본시장법 위반으로 9개 증권사에 기관경고 8건, 기관주의 1건과 함께 총 289억7천만원의 과태료를 부과했다.
금감원은 이번 조정 결정이 위법한 고객자산 운용에 대해 행정 제재뿐 아니라 민사상 손해배상 책임도 발생할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라고 설명했다. 조정안은 신청인과 증권사가 제시일로부터 20일 안에 수락하면 성립하며, 재판상 화해와 같은 효력을 가진다.
금감원은 채권 거래 과정에서 적정 가격 산정 등 건전한 채권 운용 관행이 정착되도록 유도하고, 분쟁조정 제도를 적극 활용해 금융소비자 권익 보호를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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